Sherbet


폭풍의 언덕(1847)
152023-06-30 14:44

800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인만큼 벼락치기는 상상도 하기 싫어서, 6월동안 며칠에 나눠서 한두시간씩 폭풍의 언덕을 읽어두었어요. 저는 한 10장부터 두려워지기 시작했는데 15장부터는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도 오늘(30일 새벽 3시었습니다.) 100페이지라도 읽어두어야 자고 일어나서 남은 걸 전부 읽고 지각을 면하겠다 싶어서 잠깐 읽을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침대에 앉아 3시간 40분을 보냈어요. 덕분에 새벽 댓바람부터 눈물을 한바가지 뺐네요.(비유가 아니라 정말로요.)

폭풍의 언덕은 넬리(엘렌)이 록우드 씨에게 사건을 서술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죠. 저는 제가 분명 제 3자의 시점으로 모든 사건을 알고 있는데도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특히 히스클리프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요. 심지어 15장 이후부터는 점점 히스클리프가 캐시를 사랑했던 게 맞나? 싶기까지 했어요. 그러다 33장을 넘어가고 나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렇게 된건지 모르겠던 건 히스클리프의 이야기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나한테 그녀와 관련되지 않은 게 뭐가 있겠어? 무엇 하나 그녀를 떠올리지 않는 게 있어야 말이지. 바닥을 볼 때마다 깔린 돌 하나하나에서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흘러가는 구름송이마다, 나무마다, 밤이면 들이쉬는 공기마다, 낮이면 눈에 보이는 온갖 물체 속에, 나는 그녀의 모습에 둘러싸여 지낸다니까! 더없이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얼굴에서, 심지어 내 얼굴에서조차 그녀를 닮은 점이 눈에 띄어 나를 괴롭힌단 말이야! 776p
이렇게 털어 놓아도 고통이 덜어지지는 않는군. 그러나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내 성격의 여러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야. 아, 제기랄! 너무도 오랜 싸움이었어. 이젠 그만 끝이 났으면 좋겠군! 779p
저는 소위 '망한 사랑'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에요. 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 망한 사랑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고 이해가 가지도 않는 거겠죠... 그런데도 폭풍의 언덕에서의 사랑은(읽는 내내 힘들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안돼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 같아요. 저도 열병에 걸려 앓아 눕겠다 싶을 정도로 (진짜)누가 심장을 꽉 쥐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어요. 심지어 지나치게 뇌리에 박혀서 책을 전부 읽고 잠들기 직전에도 잠에서 깬 직후에도 감상문을 쓰고있는 지금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잘 짜여진 소설임이 틀림 없는 거겠죠. 영문학 3대 비극, 세계 10대 소설이 되려면 이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싶어요... 마지막즈음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무사히 사랑했다면, 캐시와 헤어튼같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심지어 그를 지켜보는 하녀도 초반에 넬리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었죠.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어요. 캐시가 넬리에게 히스클리프와 에드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캐시가 제정신이 아닐 때(한 두 번이 아니지만요), 히스클리프와 캐시가 재회했을 때, 캐시가 죽은 뒤에 히스클리프의 독백 같은 장면들이요. 저는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전부 읽을 때까지 가슴이 갑갑하고 제정신이 아니라 아래로는 특히 기억에 남은 장면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 : 전 처음부터 꽤 오랫동안 록우트 씨가 여자 주인공인줄로 알았습니다...



그에 대한 벌로 목사님이 캐서린에게 아무리 많은 장을 외우라고 시키고, 조셉이 팔이 아프도록 히스클리프를 때려도 두 아이는 다시 함께만 있게 되면, 그리고 짓궂은 복수의 계획을 세우는 순간만 되면, 모든 걸 까맣게 잊어 버렸답니다. 106p

하지만 이제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는 건 내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되고 말았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히스클리프에게 알릴 수가 없어.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잘생겼지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똑같아. 188p

모든 것이 죽어 없어져도 그만 남아 있다면 나는 계속 존재할 거고, 다른 모든 게 있더라도 그가 사라진다면 내게 온 세상은 아주 낯선 곳이 되고 말 거야. 이 세상의 일부로 느껴지지 않겠지.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오면 나무들이 변해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 사랑도 변해 갈 것을 나는 잘 알아. 그렇지만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나무 아래 놓여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서, 눈에 보이는 기쁨의 원천은 아니지만 꼭 있어야 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에게 반드시 기쁨이 아닌 것처럼) 내 자신으로서 내 마음 속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우리가 헤어진다는 말은 하지 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193p

아, 몸이 불덩이 같아! 밖에 나갔으면 좋겠어! 다시 야생적이고 억세고 자유로웠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때는 상처를 입어도 깔깔거리고 웃어넘겼지. 미친 사람처럼 화내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몇 마디 말에 왜 미칠 듯이 피가 끓어오를까? 히스가 무성한 언덕으로 가면 틀림없이 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다시 창을 활짝 열어 줘! 어서 왜 가만히 있는 거야? 298p

네가 어떤 고통을 겪든 난 개의치 않을 거야. 네 고통에 조금도 마음 쓰지 않을 거야. 왜 너는 고통을 겪으면 안 되지? 나는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날 잊을 거니? 내가 땅속에 묻히면 행복하겠어? 20년쯤 후에 넌 이렇게 말하겠지? '저건 캐서린 언쇼의 무덤이야. 오래전에 난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를 잃었을 땐 너무 슬펐지만 다 지난 일이지. 그 뒤로도 나는 수많은 이들을 사랑했고 지금은 내 아이들이 그녀보다 더 소중해. 그리고 죽을 때에도 그녀한테로 가게 되어 기쁘기보다는 아이들을 두고 떠나게 되어 더욱 슬플 거야!' 그렇게 말할 거니 히스클리프? 373p

"넌 날 사랑했어. 그러면서 무슨 권리로 날 버린 거야? 무슨 권리로. 대답해 봐. 린튼에 대한 보잘것없는 애정 때문이었어?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를 헤어지게 할 수 없었는데, 네가 나서서 그렇게 했던 거야. 내 마음을 찢은 건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이야. 너는 그렇게 함으로써 내 마음도 찢어 놓았지. 내가 건강해서 그만큼 더 괴로워. 내가 살고 싶을 것 같아? 그게 어떤 삶이겠어? 네가...... 아, 맙소사! 내가 무덤에 있는 네 영혼과 살기를 바라는 거야?"
"날 좀 가만 둬. 그냥 두라고." 379p

가여운 사람! 당신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신경이 있었어! 그런데 왜 감정을 숨기려고 애쓰는 거야?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 봐도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 없을 텐데! 결국 하느님으로 하여금 당신 마음을 쥐어짜고 싶게 만들어서 굴복의 눈물을 흘리고 마는군! 392p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거기에 없어. 천국에 없다고. 죽지 않았으니까. 그럼 어디에 있는 거야? 아! 넌 내 고통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지! 한 가지만 기도하겠어. 내 혀가 굳을 때까지 계속 되풀이해서 기도할 거야. 캐서린 언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발 저세상으로 가지 말아줘! 내가 널 죽였다고 네가 말했잖아. 그럼 귀신이 되어 나를 찾와야지! 죽임을 당한 사람은 귀신이 되어 죽인 사람을 찾아가는 법이니까. 이승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귀신들이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어.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줘, 어떤 형태로든. 차라리 날 미치게 해 주라고! 너를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곳에 나를 버려 두고 떠나지 마! 아, 맙소사! 그건 말도 안 돼! 넌 내 생명이고 내 영혼이야. 난 내 생명 없이는 살 수 없어! 내 영혼 없이는 살 수 없다고! 394p

나한테 그녀와 관련되지 않은 게 뭐가 있겠어? 무엇 하나 그녀를 떠올리지 않는 게 있어야 말이지. 바닥을 볼 때마다 깔린 돌 하나하나에서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흘러가는 구름송이마다, 나무마다, 밤이면 들이쉬는 공기마다, 낮이면 눈에 보이는 온갖 물체 속에, 나는 그녀의 모습에 둘러싸여 지낸다니까! 더없이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얼굴에서, 심지어 내 얼굴에서조차 그녀를 닮은 점이 눈에 띄어 나를 괴롭힌단 말이야! 776p

이렇게 털어 놓아도 고통이 덜어지지는 않는군. 그러나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내 성격의 여러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야. 아, 제기랄! 너무도 오랜 싸움이었어. 이젠 그만 끝이 났으면 좋겠군! 779p

그는 끔찍한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어요. 급기야는 조셉의 말처럼, 양심의 가책이 그의 마음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떻게 끝이 날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표정으로라도 그런 마음을 내비친 적이 없었지만, 그게 그의 평상시 마음 상태였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의 평소 행동으로는 아무도 이런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을 거예요. 779p




나는 온화한 하늘 아래서에서 그 비석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히스와 초롱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방들을 지켜보기도 하고, 풀잎 사이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고요한 땅에 묻힌 사람들이 평온하게 잠들지 못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80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