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오래 전에 한 번 읽고도 가끔 꺼내보며 읽어볼 만큼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SF 이능력물... 헤테로 사랑을 좋아한다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가슴을 부여잡을지도 몰라요.
담백하다면 담백하게, 이 한 권에 이런 내용을 다 담는다는 게 정말 신기하고 또... 아쉽고 그래요.
책갈피를 여러개 해두었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마지막 장의 일부를 발취합니다. 이토록 선명하고 거짓없는 사랑은 또 없을 것임을...
<<<스포주의>>>
"그럼 저 쪽에 있는 서리 씨가 기억의 변동 없이 안전히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나요? 시간을 돌리기 전의 첫 지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말을 듣자 최주상은 정여준을 도울 생각을 지웠다. 그러나 그는 드러내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
"글쎄. 해봐야 알지."
"그럼 됐어요."
바라던 답이 나오자 최주상은 멎쩍게 뒷목을 긁었다. 정여준은 자신이 닿지 못하는 바깥공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운명 때문인지, 법칙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군데라도 어디에선가는, 시간이 제대로 흘러야지요."
"그래서 여기 계속 있겠단 거냐?"
"예."
"...그래. 난 그럼 간다. 너무 오랫동안 얼굴 쳐다봤더니 속이 안 좋아. 여기 정체가 뭔지 확인했으니 볼일은 끝났어."
"안전히 돌아가세요. 저쪽의 저를 잘 부탁할게요. 가끔 혈압 높여줄 말동무가 필요하면 언제든 와서 토론하다 가도 좋아요."
"스트레스 발산용으로 두드려 팰 샌드백이 필요하면 찾아오지."
최주상은 뒤돌아서려다 멈칫했다.
"그럼 대체 내가 없을 땐 혼자서 뭘 하고 있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해온 거랑 똑같죠. 저쪽의 서리 씨랑 내가 죽는 순간을 기다리는 거예요. 꿈꾸는 사람이 죽으면 꿈도 사라질 테니까…. 그때까진 그쪽 세상을 지켜보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보죠. 뭐. 당신들이랑 서리 씨를 구경하는 건 꽤 즐겁거든요."
최주상은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하니 그러마 하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가영이… 윤서리를 저기 살려두려고 왜 그렇게까지 견디는 거야?"
정여준은 눈을 동그렇게 뜨고 최주상을 보았다. 그리고 먼 바깥에 환영처럼 스쳐지나가는 윤서리의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겠어요?"
정여준은 미소 지었다.
최주상이 그를 완전히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낄 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