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러브, 좀비 (2023)
눞 2024-02-20 22:22

각기 다른 케이크 네 조각을 맛볼 수 있게 해놓은 책. 더 먹고 싶게끔 나를 감질나게 만들었다.

첫 번째 조각은 비릿하지만 식감이 좋았다. 육질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은 질기다는 생각이 들만큼 오래 씹게 되는데 씹을수록 나오는 육즙이 담백해서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맵게 맛보고 싶다면 새빨간 장에 찍어 먹어도 좋을 거 같았다. 젓가락으로 집다가 손가락으로도 집어먹고 싶어서 끼고 있던 반지를 뺐었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떨어진 새빨간 점을 물티슈로 닦아냈다.

두 번째 조각은 솔잎으로 장식된 윗부분이 눈에 띈다. 시원하고도 서늘한 솔잎은 여느 장식에 쓰인 솔잎과는 다르게 색이 짙었다. 초코인지 모카인지 커피인지 모르겠지만, 짙은 갈색의 조각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은은하게 달콤한 걸 보니 이 맛은 얼그레이 같기도 했다. 조각을 다 먹을 즘 접시의 바닥이 보였다. 두 사람이 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노란 끈이 그들을 둘러 하나로 묶어두었다. 내가 널 만나러 갈게. 적혀있는 문장을 읽고 솔잎으로 그 위에 대답을 만들었다. 응. 동그라미가 두 개인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세 번째 조각은 특별한 장식이나 꾸밈이 없었다. 그래서 조각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나도 내 이름이 있듯이, 케이크의 이름을 있을 테니까. 한 입 먹었을 때, 어렴풋 이름을 추측해 봤다. 두 개의 조각을 맛볼 동안 충분히 식었을 터인데 케이크는 갓 만들어지고 온기를 품어온 것처럼 따뜻했다. 그래서 이 조각의 이름은 ‘엄마’ 일 거라고 생각했다. 케이크는 정의 내릴 수 없으나 매우 익숙한 맛이 났기 때문이다. 이 익숙함이 가끔은 지긋지긋하고 치워버리고 싶을 가족을 뜻할 수도 있지만 뱉고 싶은 시큼함이 아닌 삼키고 싶은 떮음이 혀끝에 맴돌았다

마지막 조각. 슬슬 불러오는 배를 문지르고 네 번째 조각을 향해 포크를 들었다. 푹 찔러 넣기를 수없이 반복해도 이상하게 케이크는 줄지 않았다. 허공에 포크질을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 때 내가 포크가 아닌 나이프를 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포크로 바꿔 쥔 뒤 케이크를 떠 입에 넣자 씁쓸한 맛에 잠깐 말을 잃었다. 먹지 말아야 하는 걸 먹은 거 같았고 그럼에도 먹어야 하는 걸 먹은 기분이었다. 맛으로 따지자면 잘못 내린 커피에 가까웠다. 이미 잔에 채워진 커피를 되돌릴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으니 마셔야 했다.

케이크는 만족스러웠지만 다시 맛보고 싶었다. 잘 구워진 활자를 씹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이하 공감, 좋았던 발췌문 몇 개

프로듀서의 말 中
어떤 감정은 누군가 이토록 생생하게 끄집어내 주어야만 그 존재를 비로서 인정하게 됩니다. 조예은 작가가 쓴 네 편의 이야기는 마음 속 어둡고 축축한 곳에 있는 감정, 특히 여성이 느낀 감정을 홀대하지 않고 쓴 이야기입니다.

(이전에 이영의 말이 너무 좋음…)마지막 말에는 진즉 말라 비틀어진 심장이 덜컹였다. 61p
저렇게 작은 애들도 진화라는 걸 하는데, 살아 보려고 변하는데, 우리는 왜 지금껏 그대로였을까 87p